2016년 개봉작 컨택트(*Arrival*)는 외계 존재와의 ‘첫 대화’를 통해 언어·시간·운명·공감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스펙터클 대신 감성‧사유‧미학으로 SF의 경계를 확장하며, 관객에게 “미래를 알아도 그 길을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소개: 외계와의 대화가 던지는 거울
거대한 쉘(외계 비행체)이 전 세계 12개 도시에 착륙한 순간, 인류는 무력 충돌과 지적 호기심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미군의 요청으로 현장에 투입된 언어학자 루이즈 뱅크스(에이미 아담스)는,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제러미 레너)와 팀을 이루어 헵타포드라 명명된 외계 생명체와 소통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두 가지 축을 교차시킨다. 하나는 ‘언어를 통한 이해’라는 학술적 과정이다. 루이즈가 쉘 내부 유리벽 앞에 서서 화이트보드에 ‘HUMAN’을 적는 장면은, 19세기 인류학자가 미지의 부족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던 기록 영화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다른 축은 루이즈 개인의 정체성 서사다. 딸 한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루이즈가 느끼는 상실감이 플래시백처럼 반복되지만, 헵타포드 언어를 익히면서 그 장면들은 플래시백이 아닌 ‘플래시포워드’임이 드러난다. 이 반전은 관객에게 영화적 시간의 순서를 완전히 재정의하게 만들며, “기억이 아니라 예언이 삶을 좌우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또한 쉘과 인간 군대가 마주한 모뉴먼트 밸리의 풍경, 샤를루아 공항 세트에서 재현된 무重력 통로, 황혼빛 안개를 두른 쉘 내부의 미니멀한 디자인은 ‘미지’와 ‘고독’을 시각적으로 압축한다. 빌뇌브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에 오마주를 바치되, 현대적 촬영 미학과 느린 호흡으로 ‘침묵의 스펙터클’을 구현한다.
SF로서의 과학·철학·미장센
컨택트가 돋보이는 지점은 ‘하드SF’와 ‘휴먼드라마’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균형감이다. 영화 속 언어학 파트는 실제 언어학 연구진이 설계한 헵타포드 문자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원형 위에 잉크를 번지듯 분사해 그리는 이 문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비선형적 시간”을 시각화한다. 이는 물리학의 ‘동시성’ 개념, 철학의 ‘영원회귀’ 개념, 종교적 ‘예지’ 개념을 한꺼번에 포괄하며, 관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또한 헵타포드의 일곱 발 구조는 문어·오징어에 가까운 촉수를 연상시키지만, CGI 대신 실제 물리적 물체와 모션 캡처 데이터를 결합해 불쾌한 골짜기를 최소화했다. 요한 요한슨이 설계한 사운드 역시 ‘언어가 되기 전의 언어’를 탐구한다. 인간의 심장 박동·고래의 저주파·초당 18프레임으로 늦춘 현악음을 겹겹이 쌓아, 마치 공기 그 자체가 말하는 듯한 울림을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학적·미학적 선택이 모두 ‘소통’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영화 후반, 각국이 서로의 통신을 차단한 채 핵 공격을 논의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인간 내부의 두려움과 불신은, 헵타포드가 경고한 “무기 혹은 도구(Weapon/Tool)”라는 메시지의 진의와 교차하며, 언어 오해가 불러올 최악의 결과를 암시한다. 빌뇌브는 이 불안을 액션으로 폭발시키지 않고, 오히려 ‘침묵의 파국’을 선택한다. 관객은 터지지 않은 폭탄처럼 팽팽한 정적 속에서, 언어의 선택이 정치를, 정서가 세계를 바꾼다는 냉정한 진실과 마주한다.
왜 지금 추천하는가: 재관람 가치와 감정의 지층
2025년 현재, 컨택트는 팬데믹과 전쟁, AI 윤리 논쟁이 중첩된 국제사회에서 다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첫째, 영화가 보여 준 ‘정보 공유 중단’이 불러올 오판과 갈등은 가짜 뉴스와 알고리즘 버블이 일상이 된 오늘날에도 생생한 경고장을 던진다. 둘째, ‘미래를 알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유전자 편집·예측의학·생성형 AI 시대에 더욱 피부에 와닿는다. 셋째, 재관람 시 루이즈의 표정과 대사의 층위가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 예컨대 초반부, 루이즈가 벤치에 앉아 “나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여기 왔어요(I’m here to see things in a new light)”라고 말할 때 그 ‘new light’가 실제로는 비선형적 시간 전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며, 관객은 서사의 전 장면을 재해석하게 된다. 넷째, 헵타포드 언어의 수묵화 같은 유려함과,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가 포개질 때 느껴지는 ‘존재의 고요한 비가(悲歌)’는, 소셜 미디어 속도전에 지친 현대인에게 일종의 명상적 체험을 제공한다. 다섯째, 빌뇌브 감독이 차기작 <듄: 파트3> 발표로 다시 주목받는 가운데, 그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즉 컨택트는 단순 복습이 아니라, 변화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층을 생성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다.
결론. 컨택트는 “소통은 선택이며, 선택은 책임이다”라는 명제를 섬세한 이미지·음향·연기로 구현한 작품이다. 외계 언어 해독이라는 흥미로운 미스터리부터, 미래 인식과 현재 선택의 딜레마에 이르는 서사는 관객에게 깊은 공감과 윤리적 고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마주하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먼저 귀를 기울이고 말을 건네라는 가장 인간적인 해답을 제시한다.